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생시몽 공작 (문단 편집) == 생애 ==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는 1675년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피카르티 지방의 유서 깊은 기사혈통의 대검귀족 출신이었고 수많은 왕들을 모셔왔지만 정작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그의 집안이 입신양명하게 된 계기는 생시몽의 아버지인 클로드가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고 공작-중신 계급을 하사받은 일이다. 클로드는 사냥을 잘 해서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총애는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생시몽이 태어날 당시 그는 중앙 정계에서 멀어져 있었다. 클로드는 70대가 가까워지는 매우 늦은 나이에 생시몽을 얻었기 때문에 생시몽을 도와줄 사람은 주변에 많지 않았다. 이런 생시몽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생시몽을 건실하게 교육시켰고 이 과정에서 훗날에 회고록을 집필할 안목과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생시몽은 어린 시절부터 [[현시창]]에 빠진 아버지와 집안의 상황을 개탄하고 아버지가 행복한 시절이었고 귀족들이 대우받았던 루이 13세의 시절을 동경해왔다.~~정작 루이 13세 때도 [[리슐리외]]가 귀족들 열심히 때려잡은건 함정~~ 하지만 [[루이 14세]]의 즉위 이후로 시대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대검귀족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반대로 능력과 자산을 기반으로 법복귀족들이 치고 올라오는, 생시몽에게 있어서는 타락해가는(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진보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출세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대검귀족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군대에 자원하고 여러 전투를 거쳐 연대장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생시몽에게는 불행하게도 프랑스의 군대 역시 변혁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예전처럼 신분과 혈통으로 높은 군대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닌, 실력과 자산이 있으면[* 당시 프랑스는 [[매관매직]]이 공식이었기 때문에 공직들을 돈 주고 사고파는 경우가 흔했고 군대의 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분과 상관없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 특히 코르네유의 '르 시드'에서 동 로드리그가 가진 고뇌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주제이다.] 결국 생시몽은 자신의 연대가 해체되고 여단장승진에서 누락되어 버리자 이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군대를 '''불명예 제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생시몽은 군대의 체제를 개편한 루이 14세의 대신인 루부아를 증오하여 회고록에서 그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이는 이후 생시몽의 인생의 길을 가른 중대한 변환점인데, 전쟁에 집착하던 루이 14세는 대영주라는 높은 직위를 가진 생시몽이 멋대로 제대한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후 생시몽은 아버지로부터 공작-중신 자리를 이어받고 군대 시절 자신의 상관이었던 로르주 원수의 딸과 결혼한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궁정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앞의 일로 밉보였기 때문일까, 생시몽 공작은 그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예전의 실수를 되돌릴 기회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공작-중신이나 되고서도 국왕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권리인 '친견권'을 얻지 못하고 베르사유 내에서도 한동안 거주할 방을 얻지 못하다가 장인과 아내의 힘으로 겨우 방을 얻을 정도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궁정생활을 하면서 생시몽은 여러 귀족 및 대신들과 친분을 쌓고 이를 이용해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역시 그리 효과가 없었다. 루이 14세의 치세에서는 희망이 없으리라 생각한 생시몽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프티 도팽 루이|부르고뉴 공작]]과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로 들어가 활동하며 루이 14세의 사후를 기약하게 되나, 정말 재수 없게도 부르고뉴 공작은 루이 14세보다 먼저 죽어 버리고(...) 생시몽은 왕의 정부인 맹트농 부인의 파벌에 짓눌려 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서자들을 총애하고 왕위계승자 속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한다. 그의 눈에는 왕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생시몽에게는 정말 다행이게도 루이 14세가 죽은 후 [[루이 15세]]가 즉위하자 그의 친구였던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이 되었다. 생시몽은 드디어 섭정참사회에 참여하여 권력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에스파냐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능력이 어디 가는게 아닌지라(...) 그는 여기서도 그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10년이 안되어 오를레앙 공작이 사망하자, 생시몽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아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준 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시몽은 80세까지 살았기에 당시 기준으로 장수한 삶이었는데 이 때문에 주변의 가까운 인물들이 먼저 사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생시몽은 아내 마리 가브리엘 듀포트와의[* 당시 프랑스에서 알아주는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사랑하던 아내 마리를 먼저 보낸것은 물론이고 설상가상으로 아들 2명도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모두 생시몽보다 먼저 죽어버렸다. 결국 공작-중신의 직위는 이후 누구에게도 이어줄 수 없게 되었고 그가 평생을 걸쳐 추구하던 가문의 역사를 영광스럽게 이어가는 것이 완전히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딸 쪽의 후손은 생시몽이 죽기 전에는 계속 이어져 외손자까지 본 것이 불행 중 다행일까. 인생의 말년에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경험 그리고 한에 대해 서술한 생시몽은 1755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유산들을 남은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분배하고 사망하여 먼저 간 아내의 관 바로 옆에 묻혔다.[* 당시 시대는 돈과 권력을 노린 정략 결혼이 많았고 생시몽과 아내 역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나 생시몽은 아내를 정말로 깊이 사랑했고 아내 마리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매우 좋았다. 부르고뉴 공작의 사망 시 큰 좌절감에 빠진 생시몽은 정계 은퇴를 고려했지만 그런 생시몽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이 그의 아내 마리였다. 생시몽도 아내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것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유언장에서 자신의 관을 아내의 관과 쇠사슬로 꽉 붙들어 매도록 부탁하여 영원히 함께 안식을 취하기를 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